진짜 오랜만에 이렇게 생생한 한국 누아르 영화를 봤습니다. 천명관 감독의 영화 <뜨거운 피>. 제목부터 벌써 심상치 않죠. 기대 반, 걱정 반으로 봤는데... 와, 이거 생각보다 훨씬 묵직하고 씁쓸하네요. 딱 그 시절, 90년대 초반 부산이라는 배경 안에서 '정우'가 보여주는 그 희수라는 인물. 이게 참... 인간이란 게 뭘까, 삶이란 게 뭘까 싶게 만듭니다.
부산의 바닥, 구암의 건달 이야기
영화는 1993년, 부산 구암이라는 항구 마을을 중심으로 펼쳐집니다. 희수(정우)는 송영갑 밑에서 일하는 오래된 전단, 그러니까 일종의 중간 보스 같은 존재입니다. 건달이라지만 동네 어르신한테 인사 잘하고, 나름 정 있는 인물이죠. 어릴 적 구암에서 자란 친구 철진(지승현)은 엘리트 건달 코스를 밟고 출세해 돌아옵니다. 이 둘의 관계가 영화 내내 미묘하게 이어지는데요, 처음엔 서로 의리와 애증이 섞인 친구처럼 보이지만, 영화가 전개될수록 이 관계가 파국으로 치닫습니다.
뜨거운 피라는 제목의 의미
영화 제목인 '뜨거운 피'는 단순히 건달들의 피튀기는 싸움만을 의미하진 않아요. 오히려 그 안에 숨겨진 인간적인 감정들, 의리, 후회, 슬픔, 그리고 사랑까지 포괄하는 느낌입니다. 희수가 느끼는 후회와 분노, 동생처럼 아끼는 아미에 대한 책임감, 철진과의 우정과 배신... 이런 감정들이 곧 '뜨거운 피'였던 거죠. 누구나 뜨거운 피를 한 번쯤 흘리고, 그걸 흘린 후엔 식어버린 삶을 살아가는 그런 이야기.
정우, 그가 아니면 안 됐다
이 영화는 정우의 원맨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응답하라 1994>의 '쓰레기 오빠'와는 전혀 다른 결의 연기. 사투리며눈빛이며, 손짓 하나하나가 다 캐릭터 그 자체예요. 희수라는 인물이 무너지면서도 무너지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그 모습, 진짜 실감납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에서 정우가 커리어 하이를 찍었다고 생각해요. 특히 후반부 아미에게 '아버지라고 불러도 되냐'고 묻는 장면, 그때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느리고, 묵직하고, 현실적인 누아르
<뜨거운 피>는 요즘 영화들처럼 속도감 있게 휘몰아치는 액션은 없습니다. 대신 차분하게, 하나하나 조각을 맞춰가며 인물들의 심리를 파고듭니다. 그래서 중간중간 루즈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오히려 그게 이 영화의 맛이에요. 리얼한 사운드, 다듬지 않은 대사, 때론 들리지 않는 부산 사투리까지… 다 합쳐져서 진짜 ‘현장감’을 만들어냅니다. 구암이라는 공간이 가상의 마을이라지만, 스크린 너머로 그 바닷바람이 느껴지는 듯했어요.
권력, 돈, 그리고 배신
영화는 단순한 조폭 영화가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의 욕망과 배신, 그리고 시대의 흐름에 따라 소외되는 자들의 이야기에 더 가까워요. 송영감이라는 인물은 예전에는 나름 카리스마 있는 어르신이었겠지만, 이제는 시대에 밀려나고, 희수조차도 새로운 권력자들의 게임 속에서 휘둘리게 되죠. 희수와 철진, 그리고 남해장의 등장까지... 이게 단순히 ‘좋은 놈, 나쁜 놈’ 구도로 보이지 않고, 모두가 나름의 생존을 위해 움직이는 모습이라 더 씁쓸했습니다.
영화의 클라이맥스: 희수의 복수
후반부에 이르러 희수는 결국 송영감, 철진, 그리고 영광이까지 모두 손에 넣게 됩니다. 그 과정이 참 처절하고도 피곤한 싸움이었죠. 아미의 복수를 위해 희수가 선택한 방법은 결국 더 큰 폭력을 불러오는 방식이었고, 본인도 그걸 알고 있었어요. 그래도 그 선택을 했다는 점에서, 희수는 마지막까지도 인간의 뜨거운 피를 간직한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지막 장면, “누군가는 왕이 되고, 누군가는 저 밑바닥으로 떨어진다”는 나레이션이 뇌리에 깊이 남았어요.
총평: 찐한 사투리와 피, 그리고 사람 냄새
<뜨거운 피>는 완벽한 영화는 아닙니다. 2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은 조금 길게 느껴지고, 대사 전달력이 떨어지는 부분도 있었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강렬합니다. 배우들의 연기력, 특히 정우의 몰입감 넘치는 연기와, 천명관 감독이 만들어낸 90년대 부산의 느낌은 정말 잘 살아 있었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이 영화는 ‘인간’을 보여줍니다. 피도, 칼도, 욕설도 많은데… 그 안에 살아 있는 사람 냄새가 있어요. 그래서 영화를 보고 나면 가슴 한켠이 묘하게 아릿해집니다. 폭력적인 건달 이야기 같지만, 그 속에는 시대에 휩쓸리는 한 남자의 쓸쓸한 삶이 있습니다. 그래서 더 아프고, 그래서 더 기억에 남네요. 다음 리뷰도 기대해주세요.